광화문 선동가 레지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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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 이현정 학교 : 서울대학교 조회 4,730회*작품설명
인간은 자신의 살로 인해 돌을 서로 다르게 인식합니다. 감각의 불완전성, 육체의 스케일 등 육체라는 한계로 인해 인간은 서로 다르게 돌을 인식하여 서로 다른 현실을 살아갑니다. 이 서로 다른 현실 사이 틈을 비집고, 선동가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타인의 현실을 장악해나갑니다. 인간은 또한 돌을 도구화하여, 자신의 살과 같이 사용하게 됩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현대인이 세상의 소식을 대부분 SNS로 접하게 되어, 현대인은 SNS를 자신의 눈과 같이 사용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SNS는 정크스페이스의 속성들을 가지는데, 계속해서 공간이 바뀌며, 화면이라는 평면에 SNS의 공간과 사용자의 모든 감각이 종속되고, 계속해서 공간이 변화하기에 장소성을 형성할 수 없어 기억이 쉽게 휘발됩니다. 물리적 세계 내의 정크스페이스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이동하게 만들면서 지치게 한다면, SNS는 클릭 한번으로 원하는 공간에 갈 수 있고 스크롤 한번으로 공간을 축소시킬 수 있기에, sns는 사람들을 지치지도 않게 하며 중독시켜 나갑니다.
3월 9일 대선 당일 새벽, 유튜브 봇을 만들어서 리셋된 유튜브 계정으로 서로 다른 36개의 뉴스 채널 각각의 영상을 시청한 36개의 서로 다른 알고리즘을 형성하고 각 알고리즘에 따른 영상을, 그리고 각 영상들 화면에 나타나는 관련 영상을 크롤링하는 리서치를 실행하였으며, 각 영상 간의 연결을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네트워크 그래프가 나타났습니다. 네트워크의 중심에는 일상적인 영상들-음악이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들이 나타난 반면, 특정 대선 후보에 편향된 영상-빨간 점은 윤석열 편향 영상, 파랑 점은 이재명 편향 영상-의 점들은 네트워크 외곽에 위치하였고, 빨간 점은 빨간 점끼리, 파란 점은 파란 점끼리 같은 다발로 묶여 유튜브 내에서 선동적인 영상들이 각각 래빗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SNS는 현대인을 중독시키는 동시에 개개인에 맞춤화된 편향적인 내용만을 제공하기에 SNS에서의 선동가들은 서로 다른 현대인에게 각자만의 빠져나올 수 없는 래빗홀과 같은 현실을 제공하게 됩니다. 이 서로 다른 래빗홀에 빠진 SNS 유저들은 타자의 현실을 인식할 수 없기에, 자신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를 ‘멍청’하다고 표현하며, 타자의 현실에 노출될 때 이를 ‘불편’하다고 표현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개인이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온전히 인식하고 자신의 현실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여야 하나, 타자의 현실 혹은 타자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타자와 싸울 이유조차 모르거나, 싸울 의지조차 상실하게 됩니다.
반면, 광화문 광장의 선동은 sns에서의 선동과 다르게 일어납니다. 광화문 광장은 역사적인 의사결정권자의 축을 형성하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경복궁-육조거리-종각,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 앞 관청 거리, 현대의 청와대-경복궁-광화문-서울 시청을 잇는 의사결정권자들의 공간을 잇는 축입니다. 이러한 의사결정권자의 공간 내에서 선동가들은 일시적으로 거대한 그라운드를 점령하거나, 그 중 한 부분을 점거함으로써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이미 서로 다른 현실을 살아가는, 서로 다른 래빗홀에 빠진 선동가들이 자신의 래빗홀을 광화문이라는 역사적인 의사결정권자의 축에 투영시키기 위한 방식입니다. 이러한 일시적 점유는 지난한 고지전에 불과하기에 진정한 싸움도 설득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본 프로젝트는 진정한 싸움터를 제공하고자 함입니다. 진정한 싸움이란, 불편한 타자와의 각자의 현실을 지키기 위한 투쟁입니다. 이는 이미 래빗홀에 빠진 존재들에게는 서로 다른 존재를 인식하고, 보고 싶지 않아도 보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만 하는 강제성과 폭력성이 수반되는 방법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투쟁이 단순히 일시적이 아닌 일상적으로 발생하였을 때만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여 타자의 현실을 경험할 수 있는, 타인의 래빗홀을 경험할 수 있는 어떠한 존재로의 ‘되기’가 발생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되기는 비로소 선동가들이 그곳에 거주할 때 극대화 될 것이라 판단하였고, 이를 위해 광화문에 선동가의 레지던스를 마련하였습니다.
이 선동가의 레지던스에서는 선동가의 되기뿐 아니라, 시민의 되기 또한 존재합니다. sns와 광화문이라는 기존의 공간에서는 선동가와 피선동가만의 위계만이 존재했다면, 제 프로젝트에서는 시민이 선동가를 지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발화의 공간을 점유하여 새로운 선동가가 될 수도 있고, 선동가의 공간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의사결정권자의 시선 또한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시민으로서의 되기 또한 발생합니다.
이 새로운 시민과 선동가의 공간은 기존의 광화문의 축에 반발하면서 생겨납니다. 선동가들이 불편함을 마주하는 강제적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그리드를 사용하면서도 이를 의사결정권자의 축을 45도로 비틀어 발생시킵니다. 또 그리드와 대립하는 어휘로 지하공간이 발생하는데, 이 지하공간은 그리드에서 발생하는 여러 주거의 마주함을 지원하기 위해 싸움의 공간을 여러 유형으로 풀어내며, 그 유형 사이의 연결을 자유로이 합니다. 매스는 광화문 광장에서 정부서울청사쪽으로 진행될수록 높아지는데, 매스의 첫 레벨의 옥상이 지면 레벨에 마주하면서 시민은 매스 위의 의사결정권자의 공간과 지하에서 선동가를 지지하거나 장면을 차지하여 스스로 선동가가 될 수 있습니다.
싸움의 공간으로 의회, 법정, 경기장의 유형을 분석하였으며, 싸움의 공간 유형에서는 서로 다른 파로 나눈 사람들이 불편한 시선을 교환하기도, 의사결정권자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의사결정권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시선을 획득하기도 하며, 싸움이 대리자를 통해 나타나는 경우 장면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공간은 지하 공간과 선동자의 주거가 엮여 드러나며, 서로 다른 주거는 장면의 유무에 따라 서로 다른 발코니를 가지고, 서로 다른 각도로 배치됩니다. 이 주거에서는 다 함께 공유되는 식탁을 가지거나, 서로의 일상을 지켜봐야 하거나, 발코니에 침대가 배치되어 선동가의 일상을 사람들에게 낱낱이 드러내기도 합니다.
광화문 선동가 레지던스는 궁극적인 화해를 위한 불편한 마주함을 제안합니다. 현재와 같이 각자만의 현실에 몰두하여 서로의 현실을 무시한다면, 타인의 현실을 외면한 채 각자만의 논리로 타인을 배제한다면 거기에는 그 어떠한 화해도 발생할 수 없습니다. SNS로 인해 모두가 더 쉽게 선동 당할 수 있고, 또한 선동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버린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물리적 세계로 복귀하여 서로의 일상을 마주 보고 서로를 더욱 이해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